명절을 살아내고, “나는 소수자다”

친구들과 공통의 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누군가가 “야, 그 사람 게이같아. 너 친하지? 걔 게이 맞아? 하는 짓이 딱 게이같아, 어휴 싫어.” 하고 물었다. 내가 어떻게 알겠냐고 이 판에 박힌 무례한 대화를 넘기려고 하는데, 끈질기게 게이 맞느냐고 묻는다. 보통은 이런 경우 “아니겠지.” 하거나, 그 친구가 이런 의혹을 매우 고통스러워하는 걸 아는 경우 “걔 여자친구 있었을걸.” 하고 넘겨왔는데 그 날은 유독 그런 말이 안 나와서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야, 우리 주변에 게이 되게 많아. 게이가 딱 알아볼 수 있을 거고 니 주변엔 없다고 생각해서 이런 데서 함부로 묻고 그러다가 진짜 친한 사람 상처줘. 내가 만약에 레즈비언이면 지금 니가 그런 거 물은 거 얼마나 미안해하겠어.” 그러자 친구는 다시 말했다. “뭐래… 지가 레즈비언도 아니면서.” 이 혼잣말같은 거대한 질문에 대해 내가 의도적으로 대답을 않자 왜 이렇게 얼어붙는 분위기를 만드느냐는 듯이 다시 물었다. “너 진짜 레즈비언이야?” 나는 대답 대신 “이거 봐 또 이런 거 막 물어보네.” 하고 말했다. 아무 충격적인 말도 듣지 않은 상태였지만 친구 얼굴에는 이제껏 본 적 없는 당혹감이 스쳤다. 이 쯤에서 아니거든 소리가 나와줘야 마무리가 되는데 왜 대답 안 하지? 얘 진짜 레즈비언인가?

 

나이 서른을 넘겼고, 숏컷에 타투도 있는 나는 결혼 생각이 없다. 누군가 소개팅을 제안할 때 ‘어색해서 안 해요.’ 하고, 결혼계획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 “결혼 생각 아직 없어요. 안 해도 상관없어요.” 라고 대답하면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다. “너 남자 좋아하는 거는 맞지?” 자아에 대한 탐구야 평생 해도 안 끝날 일이니 타인에게도 스스로에게도 대답은 미룬다 치고, 일단 머리를 자르고 나서 좀 더 노골적으로 이런 상황에 많이 놓인 건 사실이다.

 

명절, 우리를 미치게 만든 질문들을 곱씹어보자. 만나는 남자는 있어? 연애는 왜 할 맘이 없어? 시집은 언제 가게? 돈은 좀 모았어? 직장에서 자리는 좀 잡았지? 이 질문을 받었을 때 우리가 겪었던 의식의 흐름을 상기해보자. 만나는 남자가 없음에 대한 서러움, 나 얼마 모았는지에 대한 산술적 계산, 직장 내에서 ‘자리를 잡은 것’의 기준을 뭘로 보고 대답할까… 그 모든 것들을 앞서서 떠올랐던 그것. “왜 이딴 걸 물어보지?” 

 

왜 이딴 걸 물어보지? 무례하게. 왜, 그렇게 안 살면 내 인생이 뭐가 잘못됐어? 때돼서 시집 안 가면 누가 잡아가? 내가 그렇게 이상해? 남들 다 사는 대로 안 사는 것 같으면 이런 걸 함부로 물어도 돼?

 

자, 명절에 고향으로 출발하기 전부터 이 질문을 대면할 생각에 진절머리가 났거나 혹은 이미 그걸 예측하고 해외도주에 성공한 우리가 제일 혐오한 건 뭐였을까? 결국 이 명절 안부인사 프레임 안에서는 우리가 소수자라는 사실이다. 연애 여부를 떠나 결혼할 생각 없고, 애 낳을 생각 안 해봤고, 엄마 친구 아무개처럼 모아놓은 돈으로 어디 경기도 외곽에 작은 오피스텔 하나 장만해두지 못한 우리는 질문자인 꼰대들 앞에서 소수자다. 우리를 소수자로 만드는 건 실제로 우리가 이상한 것들이어서가 아니라 저런 질문들 때문이다. 계속해서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너, 몰랐어? 너 이상해. 너 되게 잘못 살고 있어. 너 불행한데, 몰랐니? 아니 그니까 지금 그게 불행한 거라니까 얘가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남들은 안 그런다니까. 소수자야 너! 하는. 적어도 성소수자에 대해 관대한 나라에서 그네들이 겪을 상황보다, 비교하기에 따라서는 더한 것들을 한국의 명절참여자들이 겪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명절 안부인사 프레임에서 벗어나기란 참으로 어렵다. 내가 ‘너 살 너무 쪘다.’ 소리를 듣다가 확 빼고 나타나니 ‘어휴 너무 뺐다. 좀 찌워.’ 소리를 들으며 통감했듯이. 만약 당신이 우리 친척이 원하는 표준체중에 들어가더라도 어딘가에서 무조건 소수자이긴 마찬가지다.

 

 누가 중국집에서 냉면을 시켜먹어요? 때되면 자야지 12시 지나도 안 자고 왜 그러고 살아? 사람이 그래도 대학은 가야지? 남들 소주 먹는데 굳이 맥주가 먹고 싶냐? 주말에 왜 집에만 있어? 사람이 좀 나가고 그래야지? 포켓몬고 왜 안해? 야 너만 빼고 다 한다!

 

이 중 어느 하나에라도 소소한 빡침이 올라온다면 당신은 소수자다. 여기에도 안 속한다고? 문제는 이런 사람 미치게 만드는 질문은 무한대라는 점이다. 반면에 우리가 그 모든 소수를 피해갈 확률은 0에 수렴한다.

 

‘이래야 정상이야’라는 기준을 주장하는 것, 같은 테이블에 있는 이들의 동의를 얻어 대세 안에 있음을 확인하는 것, 혹시 안 그런 사람이 있는지, 누구인지 질문하는 것. 그 모든 과정은 어떤 식으로든 소수자인 우리를 스스로 미치게 만들 뿐이다. ‘오늘 춥던데 그래도 이거 입는 건 오바겠지?’ 하고 눈치봤던 수많은 피곤한 아침들, 메뉴 하나 고를 때도 내가 당장 먹고 싶은 것보다는 무엇이 이 시점에서의 적절한 초이스인가를 고민하다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던 식사자리. 그 모든 것들은 사실 우리가 그런 식으로 직접 구축한 세상이다. 소재와 배경만 끊임없이 갈아끼워진 것일 뿐이다. 그게 가장 싼티나게 드러날 때는 “너 게이야? 왜 말 못해 이 게이새끼야?” 하는 것일 테지만 우리가 무심결에 여성에게 하는 “남자친구 있어?” 같은 것들도 포함된다. ‘나는 눈 앞에 있는 니가 여성이므로 남자를 좋아할 거라고 인식하는 보통의 사람이다, 니가 남자가 아닌 여자를 사귄다면 내게는 예외적인 일일 것이고 여긴 내가 그냥 ‘남자친구 있어?’라고 물어도 되는 그런 세상이란다.’ 하고 확인시키는 것 역시 그런 세상을 만드는 데에 소소하게 기여하니까.

 

거기에 소수자에게 ‘그렇게 니네가 소수인 게 당당하면 커밍아웃해’ 같은 소리가 더더욱 의미없음은 말할 것도 없다. 피부가 까무잡잡한 편인 내가 수분크림 하러 가면 ‘고객님, 미백기능 있는 걸로 추천해드릴게요.’ 할 때 “저는 제 피부에 만족하고 휴가 때마다 태닝하고 오는데요.” 해서 점원을 무안주기보다는 조용히 매장을 나오는 일로 상황을 타개하는 사람이라도 내 피부에 대해 손가락질당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듯이. 내가 나 자신으로 사는데 그걸 왜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선언하고 투쟁해야 한단 말인가? 소수자가 아닌 이들은 그런 걸 고민조차 안 하고 복세편살하는데. 왜 컷트머리 여자들은 성정체성을 해명해야 하고 하이힐 좋아하는 이성애자 남자들은 힐 신는 사유를 연애이력까지 오픈해가며 구구절절 설명해야 하냔 말이다. 같은 상황에 놓인 동지에게 희망을 주는 것 역시 소수자의 간지나는 포인트라지만 명절때 집안 어른들과 박터지게 싸우면서 내 인생 철학을 표방하지 않고 닥칠 권리 역시 나에게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걸 앞서서 질문하지 않는다면 세계평화는 이루어진다. 이상한 사람들이 있는 게 아니라 무례한 질문들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소수자 동지들이여, 마주치기 싫은 꼰대 친척 대신 쿨한 삼촌 이모가 되자. 많은 걸 하자는 게 아니라, 이상한 질문만 하지 않아도 오랜만에 친척들 만나 떡국 한 그릇에 한 살 적립하는 일이 이렇게 소스라치게 싫지는 않을 것이다.

 

 어찌됐건 나는 올해도 살아남았다. 결혼계획이 없고 타투도 지울 생각이 없으며 상견례에 최적화된 순한 화장을 하지 않는 나는 추석에도 그대로일 예정이지만, 눈 깜짝할 사이 또 엄습할 추석을 조금은 기대하면서 기다린다. 우리를 외롭게 만드는 질문들이 조금이나마 줄어들기를. 아니면 뭐, 나도 이제 비행기표나 끊어야지.

(오마이뉴스   칼럼에서는 기사버전은 편집자에 의해 다른 제목으로 업로드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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