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을 후려치지 않기로 했다.

 PT 등록을 했다. 오랫동안 해야지 해야지 하던 일, 특히 여름을 앞두고 많이 생각하던 일이다. 하지만 절실하지가 않아서 항상 하는 유산소운동으로 대체했다. 홈트를 몇번 해볼까 했지만 원래 운동에 소질이 없고 체형이 틀어진 편이어서 혼자 무리한 근력운동을 하는 것에 걱정이 많았다. 그리고 항상 생각의 끝은 ‘내가 뭐 몸짱 되면 입금되는 직업도 아닌데, 굳이 근력운동을 뭘 해.’여서, 지금껏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원래 몸매는 좋고 싶은 사람만 좋으면 된다. 한국이 정한 미의 기준은 그 기준에 맞추고 싶은 사람들만 맞추면 되고, 이 모든 것은 개인의 소중한 선택이며 존중받아야 옳다. 그러던 내가 여름이 아닌 겨울을 앞두고서야 PT등록을 하게 된 것은 여름보다는 겨울이 내 몸에 대해 더 절실해지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근력이 없으니 안 그래도 추위를 타는 사람이 더 춥다. 체온유지에 대사의 많은 부분이 할애되는 추운 계절에는 쉽게 피곤해한다. 항상 긴장되어있는데 자세도 좋지 않으니 여기저기 뻐근하다.

 PT 상담을 받으러 예전에도 가 본 적이 있다. 트레이너는 나를 부위별로 지적했다. 상체는 너무 약하고, 하체에 살이 많아요. 잘 안 보이지만 등 뒤에도 살이 있어요. 발목에서 이어지는 라인, 엉밑살 등을 지적하고 ‘가슴살은 좀 빠질텐데, 그 부분은 괜찮으시죠?’ 같은 말도 했던 것 같다. 나는 조금 기가 죽어서 ‘네 그것보다 살 빼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아서…’. 그리고 등록은 하지 않았다. 매일매일 헬스장에서 그 눈을 마주하는 게 싫었다. 운동을 해보려고 뭔가 시도하려 할수록 매일매일 동기부여가 바닥을 뚫는 그 기분이 싫었다. 남 앞에서 하는 운동이란 마치 진작에 내 마음을 눈치챈 짝사랑을 대하는 것 같았다. 다가가려 할수록 자꾸 밀어내는 것 같고,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그렇게 점점 더 작아지고.

 그러던 중 ‘너는 예쁘지만 그래도 빼고 싶다니 이걸 해봐.’ 하던 좋은 언니를 만나서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혼자 체중조절을 했다. 수치만 놓고 보면 많이 살이 빠졌고 그 이야기가 책으로도 세상에 나왔지만 책에서 언급했듯 그렇다고 내 삶이 드라마틱하게 나아진다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심지어 돌이켜보면 그 전의 내 몸도 과체중은 아니었다. 오히려 빼보니 불균형이 심한 부분도 있고, 이렇게 저렇게 내 몸이 다양하게 변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내 몸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살을 뺐더니 너무 뺐다고 하는 사람들과, 조금 더 빼야 한다는 사람이 공존한다는 것이 신기했다. 친구들이 다이어트팁을 많이 물을 때 대답해주기도 했지만 ‘나 다이어트 해야겠지?’ 하고 물을 때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했으며 그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한국에 정말로 다이어트가 필요한 사람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몇 번의 여름을 맞고, 가을을 맞고, 2017년의 겨울을 마주한 나는 오랜만에 PT상담을 받으러 갓다.

 내 몸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하러 남 앞으로 가면서 긴장이 안 되지는 않았다. 일부러 여자 트레이너가 많다는 곳으로 가서 상담을 시작했다.

 “몸이 많이 뒤틀려있어서 허리가 아파요. 글을 쓰기 시작하면 집중해서 몇 시간씩 쓰는 편이어서 거북목도 심해요. 근력운동을 해서 근육량을 키우고 싶고, 무엇보다 집에서 혼자 할 수 있게 맨몸운동 자세를 정확히 배워서 평생 혼자 힘으로도 운동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트레이너님은 상냥하게 상담에 응해주셨고, 나는 결제를 마치고 인사를 했다.

 “식단도 같이 짜드릴 거예요. 병행하시면…”
 “아, 식단은…”

 다음 말 잇기를 어려워하면서 내가 아직은 완전히 이런 대화에 자신있진 않다는 걸 체감했다. 하지만  용기내서 말을 뱉으면서 느낀 기분은 근 몇년간 없었던 해방감 같은 것이었다.

 “식단 관리는 안 할 생각이에요. 체중감량은 더이상 안 해도 좋아요. 여기서 더 살을 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지금처럼 먹는 거 다 먹으면서 좀더 활력있게 살고 싶고, 덜 피곤하고 싶어요.”

 다행이 트레이너님은 금방 어떤 의미인지를 캐치하고 수업 전에도 꼭 이 부분을 이야기해달라고, 원하는 프로그램을 짜는 데에 참고하겠다고 말해주셨다. (내 몸이 감량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하신 질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PT샵을 찾는 사람들이 돈을 지불하며 청구하는 결과가 감량이기 때문에 업무의 일부로 말씀하신 것 뿐이다. 답변을 드렸을 때 금방 동의해주셨다.)

 내가 전보다 체형에 대해 덜 의식하게 됐다고 해서 내가 나은 인간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타인의 기준에 맞춰 내 체형을 의식하는 것은 미성숙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다. 반대로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항상 받아온 압박인데 그걸 느끼지 않는 것이 오히려 희귀하다. 어찌됐든 체형에 대해서 덜 의식하게 된 것은 사실인데, 최근 느끼는 것은 타인이 가진 모든 체형의 아름다움을 존중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게 ‘내 체형을 함부로 후려지지 않는 것’이라는 점이다.

 말은 중요하다. 타인을 해할 여지가 있는 말들 중 그게 누구의 입에서 나가서 누구에게 닿든 결과적으로는 악한 경우가 있다. 나는 그 예에 가장 부합하는 말이 “제가 뚱뚱해서요.” 인 것 같다. 나보다 체중이 확연히 더 나가는 사람 앞에서 체형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극명히 그것을 느낄 수 있다. 그 앞에서 “아, 제가 뚱뚱해서요.” 같은 말은 하지 않게 된다. 굳이 그런 말을 하지 않으면 우리 서로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고 느낄 텐데, 내가 내 몸을 그렇게 후려치고 타인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비하하는 순간 그 자리에 있는 모두는 또 그런 내 몸을 기준으로 본인을 평가해야 한다. “에이, 저보다는 낫잖아요.” 같은 말을 해가면서. 하나도 즐겁지 않다. 내가 그렇게 말로 후려친 것은 내 몸만이 아니다. 모두에게 모두에 몸에 대해 그런 후려침을 제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상체는 말랐는데, 엉덩이는 돼지예요.” “목이 가늘긴 한데 짧은 편이라서 안 어울려요.” “광대가 있는 얼굴이라서 단발머리는 하면 안 돼요.” 내가 나를 향해 겸손한답시고 한 농담들은 그렇게 새로운 (이미 오조오억개가 있는) 외모적 잣대가 되고, 그게 또 한 바퀴를 돌며 타인을 상처준 후 나에게로 와서 무거운 추가 될 것이다.

 “민지씨는 **이 예뻐요.”라고 누군가 칭찬한다면, “그렇지도 않아요, ##이 워낙 **하게 생겨서 딱히…”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영희씨는 @@이 예뻐요.” 하고 서로서로 올려쳐주면 다같이 행복하다. 타인이 나를 칭찬할 때, 내가 나의 겸손을 위해 나를 항상 ‘부분적으로’ 예쁘다고 하고 없는 결함 있는 결함을 끄집어낸다고 해서 여기서 누구하나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너도 나도 예쁘고 멋진 존재라고 해주다보면 그런 아름다움의 기준들이 늘어난다.

 예전에 언어에 대한 칼럼을 써보고 싶어졌던 적이 있다. 내게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언어는 한국어, 일본어, 영어가 있고 그 각각의 언어를 이야기하게 되는 특정 집단들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같은 질문을 하더라도 여기서 내가 어떤 언어를 쓰느냐에 따라서 답변 내용 자체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영어로 누군가 “(민지 몸매 너무 예쁘다.)” 한다면 아마도 “Thank you! 너도 예뻐!”, 심지어 가끔은 “알아. 그치?” 하면서 장난스럽게 웃고 넘어갈텐데, 그 말을 한국어로 듣고 한국어로 수긍하자니 용기가 필요하다. 칭찬의 말에는 일단 “아이고 아니에요~”로 시작해야 할 것 같으니까. 적당히 겸손한 화법을 유지하려던 것이 어찌보면 다함께 서로를 낮추면서 동시에 여러 사람의 자존감을 깎아먹는 데에 기여했던 건 아닌가 싶다. 반대로 한국어로 소통할 때 훨씬 기분좋게 이어져가는 대화들도 있다. 칭찬에 한해서만큼은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후려치지 않기로 했다. 함부로 내 외모적인 단점을 말하면서 타인의 동조나 동의를 구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2017년 한국이 요구하는 기준에 완벽히 부합하더라도 누군가는 나를 부위적으로 지적할 여지가 있다. 그런 상황에는 분명 그간의 내가 티끌만큼이라도 기여한 바가 있다. 타인의 외모지적을 하면서뿐만 아니라, 내가 내 몸을 후려치면서.

 내가 내 외모를 후려치지 않는 것은 내가 내 외모에 대해 하고 있는 결정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타인은 내가 내 몸에 내리는 결정을 비난할 수 없다. 먹어서 살찐 것을 비난할 수 없듯이 다이어트를 하는 것에 대해 세상의 기준에 나를 맞추려 한다느니 몸매에 대한 강박이 있다고 비난할 수 없다.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진한 화장을 하는 것은 모순이나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나는 내가 보는 시선에 맞춰서 나를 꾸미고 거기에서 행복을 느낄 권리가 있다. 의학의 힘을 빌리든, 보정속옷을 입든, 자외선차단제를 안 바르고 뛰어다녀서 기미를 유발하든, 반대로 그 피부를 완벽하게 커버하든 2017년을 살아가는 내가 내 경험을 바탕으로 내 주관을 가지고 내 몸에 하는 일들과 그 결과인 내 외모에 대해 타인에게 해명하거나 동의를 구할 필요가 없다. 반대의 이유로 타인의 외모에 대해서도 그래서 지적하거나 내 기준의 개선점을 제안하지 않는다. 너의 있는 모습 그대로가 가장 예쁘다기보다는, “넌 니가 하고 싶은대로 할 때가 가장 예뻐”가 더 와닿는다. 2017년을 사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꾸미지 않은 샤워 직후의 모습만을 드러내고 사랑하라고 강요하는 것 역시 어떤 의미로는 폭력이니까. 외모를 후려치면 안 되듯이, 모두의 마음이나 결정도 후려치면 안 된다.

 나를 예쁘지 않다고 하던 사람의 마음을 바꾸려면 말 그대로 뼈를 깎는 고통이 필요하지만, 그렇게 해서 바꿀 수 있는 시선은 고작 1개, 눈 두 개 뿐이다.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가면 또 나는 결점 투성이가 된다. 의지박약에 편한 대로 살고 싶은 우리가 그런 혹독한 개고생을 하지 않고서도 예뻐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내가 그냥 나를 올려치는 것. 그게 (남들이 말하는 기준에서의) 외모관리에 실패한 자의 정신승리라고 해도 상관없다. 그 정신승리 역시 나의 결정이고, 내가 그걸 존중하면 되니까. 갑자기 사라지지 않을 어느 정도의 외모적 열등감, 강박, 혼란스러움도 내가 지긋이 바라보면서 존중하면 된다. 그것 역시 타인이 함부로 후려칠 수 없는 나만의 권리니까.

 나는 그저 내 방식으로 여기에 있다.
 그래도 된다.
 나는 내 몸을 후려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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